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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들의 특별한 합숙…"타인과 사는 법 깨달았죠"
- 서울여자대학교 53년 전통 기숙사교육
이한길 / 동아일보 기자 싸이월드 공감
올해 서울여대에 입학한 연지현(19)씨와 이지은(19)씨는 학기 초인 지난 3월 말부터 3주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원래 지현씨의 집은 서울이고 포항이 고향인 지은씨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지만 이 기간만큼은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다. 두 사람과 함께 기숙사 608호에 딸린 방 4개를 나눠 쓰는 다른 13명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진짜 어색했죠. 다들 전공도 제각각이고 고향도 다르잖아요. 괜히 휴대전화를 쳐다보고 평소엔 안 하던 공부를 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기숙사 입소 첫날, 608호에 들어온 15명의 학생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처음 본 사이다보니 같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꺼렸다. 청소와 정리는 스스로 해야 했다. 초ㆍ중ㆍ고 내내 대부분 혼자 방을 쓰고 청소와 빨래는 엄마에게 맡겼던 학생들에겐 생소한 일이었다. 지은씨 역시 "대학에 오기 전까진 혼자 방을 썼고 청소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들어온 지 셋째 날이 되자 화장실 휴지통이 꽉 찼다. 아무도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밤 608호 학생들은 회의를 열어 세 가지 생활규칙을 정했다. 첫째는 거실과 화장실 청소는 함께 하기, 둘째는 샤워한 뒤 빠진 머리카락은 직접 치우기, 셋째는 분리수거 잘하기였다. 3주 간의 합숙을 마친 지현씨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기숙사 생활을 한 건 서울여대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바롬인성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바롬은 '바르다'의 순우리말이다. 서울여대 신입생이라면 1학년 1학기 때 3주 동안 바롬인성교육관에서 합숙생활을 해야 한다. 올해도 1학기 동안 신입생 1,800여 명이 네 번에 걸쳐 교육을 받고 있다.
합숙·강의 통해 꿈 찾고, 인성 기르며, 대학생활 배워
3주 동안 그냥 합숙만 하는 건 아니다. 정규수업이 끝난 오후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인성 등에 대한 수업을 듣는다. 강의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인생 그래프 그리기 등을 통해 꿈을 찾고, 예절 등 인성을 배우며, 선배들로부터 대학생활에 대해 조언을 듣는다. 합숙기간 동안 생활지도교사 9명과 30여 명의 강사진이 교육을 맡는다. 오전 7시부터는 인성을 주제로 한 원어민 영어수업도 진행된다. 예를 들어 용기(courage)나 자선(charity)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돌아가면서 영어로 발표하는 식이다. 비용은 전액 무료다. 학생들은 하루 2,500원 정도의 점심값만 낸다.

기자가 서울여대를 찾은 지난 3월 28일. 다른 대학이라면 새 학기를 맞아 신입생 환영회와 개강파티로 캠퍼스와 주변 술집이 들썩일 시간이었지만 서울여대 바롬인성교육관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 건물은 서울여대가 인성교육을 위해 1998년 지은 것이다. 서울여대 관계자는 "오로지 인성교육만을 위해 10층짜리 건물을 짓고 학생들에게 무료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대학은 서울여대 뿐"이라고 말했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8개 강의실에선 예절 수업이 한창이었다. "여러분, 인사(人事)라는 한자의 뜻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에요. 인사는 그저 상대방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먼저고 그것이 몸 밖으로 표현돼야 하는 거죠." 전문예절강사의 설명에 따라 학생들은 2시간 동안 악수나 인사 등 기본적인 예절을 직접 실습했다. 수업이 끝난 뒤엔 9시부터 기숙사에 모여 방별로 생활지도교사의 지도로 생활교육이 이어졌다. 이날의 생활교육 프로그램은 '빨래통 놀이'였다. 15~16명이 엉킨 빨래처럼 옆 사람과 양손을 엇갈리게 맞잡은 뒤 이를 풀어내는 놀이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엇갈린 양팔을 풀 수 없고 함께 몸을 부대끼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1961년 개교 때부터 내려온 전통…"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았구나" 깨달아
합숙을 통한 서울여대의 인성교육은 1961년 개교했을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바른 성품을 갖지 않으면 기술과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회를 위해 제대로 쓰일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개교 당시엔 '생활교육'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전쟁 직후 한국이 막 성장하던 시절 농촌을 변화시키는 여성지도자를 기르는 게 목표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과정 중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시간도 있었다. 버스나 교통수단이 없는 농촌지역을 돌아다니기 위해선 자전거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체력단련을 위해 수영을 가르치던 때도 있었다. 개교 당시엔 4년 내내 합숙생활을 했다. 3년 간 생활관(기숙사) 교육을 마치고 나면 1년 동안은 일반 가정집과 똑같이 생긴 실습주택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청소도 했다. 서울여대 관계자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선 청소·요리·빨래 등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후 학생 수가 늘면서 합숙기간이 조금씩 줄었다. 1981년부터는 '사회지도자 훈련'으로 과목이름이 바뀌면서 합숙기간도 한 학기가 됐다. 지금처럼 3주간의 합숙교육이 정착된건 1998년부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원과 시험 부담에서 갓 해방된 대학생들에게 합숙을 통한 인성교육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경영학과 1학년 권소망(19)씨는 "솔직히 처음 들어갈 때는 불만도 있었어요. 그런데 3주 동안 지내면서 '고등학교 내내 내 공부, 내 성적….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았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라고 말했다. 권씨는 요즘 무슨 일이든 남을 먼저 배려하게 된다고 했다. 외국인 학생이라고 예외는 없다. 중국 출신인 경영학과 1학년 왕샤오핑(27)씨는 "합숙을 하면서 한국인 친구들과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어 학교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며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합숙을 들어가고 싶다."고 웃었다. 실제로 지난해 합숙교육을 받은 신입생 2,000명을 상대로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인간관계에 도움이 됐다'는 응답이 5점 만점에 4.5점 나왔다. '친구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4.3점)는 답도 많았다. 올해 1차로 교육을 받은 52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학생들의 도덕성과 배려심 등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 '사회'· '세계'를 깨우는 교육
서울여대의 인성교육은 1학년으로 끝나지 않는다. 2학년 때는 2주간 합숙을 하며 주로 소통ㆍ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3학년이 되면 합숙은 하지 않지만 한 학기 동안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인권 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다. 1~3학년 모두 1학점짜리 필수교양과목이라 이 수업을 듣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다. 1학년 때가 꿈과 인성에 대해 배우는 '나를 깨우는 교육'이라면 2학년 때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배우는 '사회를 깨우는 교육', 3학년은 전 세계 이슈를 다루는 '세계를 깨우는 교육'이다. 권계화(수학과 교수) 서울여대 바롬인성교육원장은 "핵가족화와 입시 경쟁으로 중·고등학교 때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 진출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타인과의 소통능력 등 인성을 길러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인성교육이 취업에도 플러스 요인이 된다고 했다. 중어중문학과 4학년 이지애(22)씨는 "취업한 선배들이 '학교 때 배웠던 예절과 인성교육이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서울여대의 인성교육은 다른 대학들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지난해에만 울산대 등 14개 대학이 바롬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견학했다.
연세대 '레지덴셜 칼리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성균관대 '인성 강의' 등 운영
서울여대 뿐만 아니라 최근 국내 대학들은 인성교육을 강화하는 추세다. 연세대는 올해부터 전체 신입생이 한 학기 동안 인천 송도의 '레지덴셜 칼리지'에서 생활하게 한다. 하루 24시간을 학교 안에서 교수·동료들과 보내며 일상 속에서 전인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다. 정갑영 총장은 지난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지도자가 되기 위한 소양을 익히고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능력을 키우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숙명여대도 유사한 형태의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영국 옥스퍼드, 미국 예일대 등 외국의 유수 대학들은 수십 년 전부터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해 오고 있다. 경희대는 교양교육을 위해 '후마니타스 칼리지'란 이름의 전담 기관을 2011년 만들었다.

후마니타스는 공동체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을 실천에 옮기는 교양인을 일컫는다. 이 기관에 속한 전담 교수만 100명에 이른다. 학생들은 1학년 한 해 동안 인간의 가치 등을 공부하는 '중핵교과'라는 과목을 의무적으로 수강한다. 2학년 1학기에는 '시민교과'라는 과목을 들어야 한다. 성균관대도 교양과목 중에서도 인성 관련 과목을 한 강좌 이상 반드시 이수하게 한다. 또 재학 중에 최소 30시간의 사회봉사를 하게끔 유도한다. 지난해 졸업생은 1인당 71시간을 봉사해 목표치를 배 이상 넘겼다. (사진 출처 : 중앙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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