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육, 아이폰에서 노벨상까지
윤샘이나 / 서울신문 기자 싸이월드 공감
Ⅰ. 거대한 연구도시 츠쿠바를 가다
일본 도쿄의 거대한 전자상가 밀집지역인 아키하바라에서 TX(츠쿠바 익스프레스)를 타고 한 시간 여 달리면 조용한 연구도시 츠쿠바에 도착한다. 검소한 기차역을 벗어나면 보이는 한적한 마을 풍경에 언뜻 수도 근교의 조용한 위성도시로 보이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이 도시가 움직이는 거대한 소리가 들린다. 대학과 기업의 연구소, 연구단지가 밀집해 있는 이 곳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도시 중 한 곳이다.

가장 조용하면서도 바쁜 이 도시의 중심에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인 국립 츠쿠바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약 60㎞ 떨어진 이바라키현 츠쿠바시에 위치한 이 대학에는 정문도, 울타리도 없다. 일본의 다른 대학이 일과시간이 끝난 후 대개 정문을 닫는 것과 달리 츠쿠바대학은 개교 때부터 캠퍼스의 출입문을 만들지 않았다. 언제나 열린 교육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다. 우거진 숲 사이에 띄엄띄엄 세워진 대학건물과 각종 연구시설들은 약 2,700만㎡(약 816만 평)의 광활한 캠퍼스 위에 경계를 짓지 않고 어우러져 하나의 연구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1973년 개교 당시 ‘제2의 도쿄대’를 목표로 출발한 츠쿠바대학은 현재 이공계와 의료 분야에서 강점을 보이는 일본 제일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자리잡았다. 대학과 연구소, 민간기업이 한데 모여 있는 이곳에서는 연구와 실습, 실용이 모두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츠쿠바시가 일본의 ‘실리콘 벨리’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생들과 연구진의 끊임없는 연구 바탕으로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곳, 그리고 머지 않아 그 아이디어가 현실화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연구와 실용이 공존하는 이곳의 원동력은 열린 교육이라고 입을 모은다.
Ⅱ. 츠쿠바대학의 열린 교육, 학군과 학류 제도
실제 츠쿠바대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3명 배출한 세계적인 학문의 산실이자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공장으로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 자율적인 연구와 열린 교육을 강조하는 이 대학은 교토대 출신으로 츠쿠바대학 교수가 된 도모나가 신이치로 명예교수의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시작으로 1973년 에사키 레오나 명예교수의 노벨 물리학상, 2000년 시라카와 히데키 교수의 노벨화학상까지 역대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 대학의 노조무 가와가쓰 교수는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우리 대학의 환경이 큰 성과로 이어진 것 같다.”면서 “노벨상 수상자와 같은 학교에서 연구하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연구하는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가와가쓰 교수는 “스스로 연구하고 싶은 사람에겐 연구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똑같은 것만 주입한 과거의 풍토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열린 교육과 학생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연구를 강조하는 츠쿠바 대학의 학풍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이 대학 이공계열 학군에서 5년째 운영하고 있는 ‘열린 대학에 의한 선도적 연구자 자질 형성 프로그램’이다. 이공학군·정보공학군·생명환경학군 등 3개 학군(學群)에서 지원한 500여명의 학생 중 17명을 선발해 각자 지도교수와 연구실을 제공하고 1~3학년에 걸쳐 관심 주제를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은 연구 주제와 방법, 기간 등 연구에 관한 모든 것을 스스로 설계해 연구를 해나가고 있다. 연구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3개월에 한번씩 자신의 연구 과정을 발표하는 것. 결과를 내놓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연구가 얼마나 진행이 됐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공유하는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학생을 지원하고 응원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츠쿠바대학이 생각하는 ‘선도적 연구자 자질’이란 광범위한 학문분야 가운데 자신이 관심있고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발굴하고 연구방향 설정부터 과정, 문제 해결에 도달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생명환경학군 생물학류 3학년 이토(21)씨는 “수업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 종일 내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방학이 오히려 더 바쁘다.”고 말했다. 1년에 56만 3000엔(약 778만원)을 지원받는 이토는 ‘복합체기능 미지 단백질의 기능 및 상호작용 해석’이라는 연구를 2년째 진행해 학부생 자격으로 이례적으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냈다. 이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인 시라카와 유키 교수는 “공부가 이미 옳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연구는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라면서 “우리 대학 학생들은 지금 틀을 깨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다양한 학문 사이를 오가는 진정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츠쿠바대학의 열린 교육 풍토는 이 대학의 독특한 학과제도에서도 엿보인다. 츠쿠바대학은 일본의 다른 대학에서 운영하는 학부제보다 넓은 개념의 학군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인간학군·사회국제학군 등 학문을 폭넓게 분류해 다양한 수업의 선택과 통합적인 공부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학생들은 같은 학군 안에서 자유롭게 수업을 선택해 들을 수 있고, 원한다면 다른 학군에 속한 수업으로 시간표를 채울 수도 있다. 학생 스스로 자신의 전공을 개발하고 구성해 학점을 신청하는 ‘학점 취득제’를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대부분 자기 전공의 수업으로 짜여진 시간표대로 따라야 하는 다른 대학과는 다른 점이다. 이 대학의 야마다 데쓰야 홍보실장은 “학생 스스로 흥미를 느끼고 공부하고 싶은 학문을 선택하는 행위를 존중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Ⅲ. 한국의 열린 교육
최근 한국에서도 학생들의 창의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키기 위한 다양한 열린 교육의 시도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 움직임은 츠쿠바대학처럼 이공계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대학에서 앞장서 주도하고 있는데, 새로운 시도에 대한 반응은 여전히 엇갈린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지난 1991년 무학과·무학년 제도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입학할 때부터 학과 또는 학부를 정해 공부방향을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접한 뒤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맞는 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학생들은 입학한 뒤 3학기 동안 모두 인문 사회과학부에 소속돼 학과에 구애받지 않고 교양 및 기초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고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연구 주제와 방법을 스스로 설계한 뒤 2학년 2학기부터 본격적인 전공공부를 시작한다. 현재는 카이스트 외에도 포스텍,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 광주과학기술원(DGIST) 등 다수의 이공계 특성화대학이 무학과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종합대학의 경우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서울대를 비롯한 20여 개 4년제 일반대학들이 2009년부터 자유전공학부와 자율학부 등의 이름으로 사실상의 무학과제를 운영하고 있다.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등 전문대학원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학부에서는 학생의 잠재력을 기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학과를 정하지 않은 1~3학기 동안 학생들은 공대와 인문대, 예술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적성과 관심주제를 파악한다.

그러나 열린 교육과 융합교육을 표방하며 도입된 자유전공제도가 국내에서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고스펙의 청년도 취업난에 시달리는 국내 대학가의 현실에서 진정 자신의 적성과 관심을 따라 전공을 탐색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자유전공학부 도입 4년차를 맞아 지난 2월 첫 배출된 졸업생들을 살펴보면 통섭과 융합인재 육성이라는 취지가 무색하게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공선택 시 취업에 유리한 경제·경영학과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서울대가 2010년 1학기부터 2013학년 1학기까지 7학기 동안 학생들의 누적 전공선택 현황을 집계한 결과, 총 851명의 학생 가운데 경제학과를 선택한 학생이 전체의 22%인 187명, 경영학과는 17%인 147명이었다. 전체 약 40%의 학생들이 경제·경영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일부 학교에서는 자유전공학부가 로스쿨이나 각종 고시 준비반으로 성격이 변질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열린 교육을 향한 시도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창의적 사고와 학문의 통섭이 강조되는 시대에 전공선택의 자유와 다양한 학문의 통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런 점에서 서울대가 도입하고 있는 ‘학생설계전공’은 무학과, 자유전공학을 한 단계 뛰어넘어 학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츠쿠바대학의 ‘학점 취득제’와 같은 이 전공은 학생 스스로가 2개 이상의 학과를 융합해 자신만의 새로운 전공을 만들도록 하는 제도다. 현재까지 모두 40명의 학생이 법사회학, 인지생물심리학, 인문소통학, 시각문화학 등 자신만의 전공을 설계했다.

대학에서 시작된 열린 교육의 움직임은 점차 초·중·고등학교에서도 활기를 띄고 있다.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예술(Art), 수학(Mathemat­ics)의 첫 글자를 딴 ‘STEAM 교육(융합인재교육)’은 최근 일선학교 현장에서 빠르게 확산 중이다. 교실에서는 이전의 수업시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된다. 학생들은 학문의 원리를 말로 풀어내 설명하는 스토리텔링식 기법, 스테인드글라스 안에 숨어 있는 나노과학 기술 등 두 가지 이상의 학문을 넘나들며 사고력을 키운다. 이처럼 개별 학문의 경계를 넘어 특정 주제나 과제를 중심으로 수업을 이끌어 학생들의 참여도와 몰입도를 높인다는 평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STEAM 교육의 현장 확산을 위해 지난해 전국 80개교를 STEAM 리더스쿨로 선정, STEAM 과목을 시범적으로 학교교육에 적용·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리더스쿨 외에도 150개교에서 다양한 과목의 교사가 함께 STEAM 교육 콘텐츠를 연구·개발하는 교사연구회 활동을 하고 있다.
Ⅳ. 열린 교육의 성과, 아이폰에서 노벨상까지
지난해 12월 10일 발표된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의 동양인 2명이 포함됐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중국의 모옌, 그리고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야마나카 신야 교수가 그 주인공. 후보자 명단에 들지 않아 기대감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국내 학계는 씁쓸한 속내를 감출 수는 없었다.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철이 되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한국의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 발전의 척도로 여겨지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등 과학분야 노벨상에서 일본은 역대 14명의 수상자를 배출하며 과학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일본은 지금까지 물리학상 8명, 화학상 7명, 생리의학상 2명, 문학상 1명, 평화상 1명 등 총 1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 가운데 2000년 이후에만 11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쏟아져 나오는 등 일본은 점차 세계 과학계의 주류로 진입하고 있다. 주제와 방법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연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일본의 연구풍토는 2050년까지 30명 이상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는 공언이 단순한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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