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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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①
방학에 대한 새로운 상상 : 존재론적 성장을 꿈꾸다
이상은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방학에 대한 새로운 상상 : 존재론적 성장을 꿈꾸다
빈 여백으로서 남아 있는 방학의 존재에 대해 묻다
학교의 시간에는 방학이 있다. 방학(放學)은 그 의미 그대로 ‘배움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학교의 시간을 이미지로 상상해 보면, 학기 중의 시간은 ‘교과’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기술·가사 등 수많은 교과 내용과 근래에는 다양한 진로 프로그램 등의 교과 외 활동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더이상 수용하기 어려운 과포화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득차서 비대해진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교육적인 시간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이 시간에 무엇을 더 가르칠까?’, ‘어떻게 시간 배치를 바꾸어 볼까?’ 등의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오고 있다. 이에 반해, 방학은 그냥 비어 있다. 이 또한 학교교육을 메우는 시간의 일부이지만, 없는 것처럼 빈 여백으로 덩그러니 존재한다. 물론, 빈 여백으로 남아 있는 방학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배움에는 쉼이 필요하고, 밖으로부터의 배움 이후에는 스스로 익힘의 시간이 필요함은 자명하다. 다만, 배움의 시간이든 쉼의 시간이든 모두 더 나은 존재로의 성숙의 시간임을 고려할 때, 그냥 빈 여백으로 남겨져 있는 방학이 성숙의 시간으로 이어지도록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져 본다.
방학에 ‘존재론적 성장’의 결을 입히다
방학의 시간이 성숙의 시간이 되도록 아름다운 결을 입힌다고 할 때, 나는 ‘존재론적 접근’에 주목하고 싶다. 존재론의 의미는 여러 측면에서 말해질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존재에 대한 경건한 사유’라고 평가되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근거하여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난해한 하이데거의 사상을 일면 단편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 접근의 의미를 쉽게 말해보면 그것은 현재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학교교육에 주는 함의는 무엇보다 기존의 ‘지식’, ‘앎’을 강조하던 인식론적 접근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존재’로 세계를 살아갈지를 자각하며 배워갈 필요가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데에 있다. 학생들이 방학이라는 쉼의 시간 동안에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앎의 추종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도록 해 주면 좋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교육에서 존재론적 접근의 중요성을 말하는 목소리 는 탈맥락적으로 말해지는 허울 좋은 소리는 아닌 듯하다. 이것에 주목하는 배경은 최근에 자주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 ‘AI 시대’, ‘융·복합 시대’등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화 담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현 세계를 둘러싼 변화의 양상에 대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바, Barnett(2000)은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초복합성(supercomplexity)’ 이라고 부른다. 인류는 태고 적부터 늘 세계의 변화 속에서 존재해 왔으나, 최근의 ‘초복합성’ 사회에서 직면한 변화는 이전과는 다른 속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풀리지 않는 질문이 제기되며, 나름의 답을 찾고자 노력하더라도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 가운데 더 미궁으로 빠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교해 보자면, 과거 ‘복합성’의 시대에도 풀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었던 반면, 최근에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은 완전하게 풀 수 없는 것들이며,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해석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인류는 알면 알수록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이 되는 혼돈의 상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공지능 시대에 윤리 문제나 선량한 시민을 대상으로한 무차별적 테러와 같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것은 풍부한 ‘지식’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이제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며, ‘불확실성’을 갖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의 구체적인 존재됨에도 영향을 미친다. 불확실한 세계에 둘러싸인 인류가 겪는 경험은 ‘불안’, ‘염려’, ‘혼돈’, '연약함'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내-인간은 그동안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의 열쇠라고 여겼던 ‘지식’의 가치에 대해 다시 묻고,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가 늘 ‘지식’, ‘앎’을 강조해 온 이면에는 세계의 확실성이 가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 오랫동안 인류는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여기며, 우리의 이성을 활용하여 세계를 ‘알수 있는 것’, ‘예측 가능한 것’, ‘조작 가능한 것’으로 다루어 왔다. ‘지식’은 이 과정에서 활용되는 요긴한 수단이자 또한 그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의 뜻대로 조작하기 위해 지식은 오랫동안 가장 가치 있는 교육내용으로 간주되어 온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막다른 상황에 봉착한다.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설 무렵부터 인류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 많은 사태에 직면하면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세계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세계의 ‘불확실성’ 앞에 놓인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동원하더라도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세계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 파생되는 불안감을 떠안고 알 수 없는 세계속을 의연하게 살아나가는 삶의 자세가 더욱 긴요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복합성 시대에 교육의 존재론적 접근이 주목받는 배경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존재론적 성장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Barnett(2009)은 이것을 ‘성향’과 ‘자질’이라는 두 측면으로 구분한다. ‘성향’이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하는 경향성이자 세계를 헤쳐 나가려는 의지로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된다. ‘학습 의지(a will to learn)’, ‘참여 의지(a will to engage)’, ‘경청 자세(a preparedness to listen)’, ‘새로운 경험에 대한 탐험 자세(a preparedness to explore, to hold oneself to new experiences)’, ‘앞으로 나아가려는 투지(a determination to keep going forward)’등이 이에 속한다. 한편, ‘자질’이란 이러한 성향이 발현되는 양상으로서, 개인의 인격적 측면과 관련된다. ‘용기(courage)’, ‘회복탄력성(resilience)’, ‘사려 깊음(carefulness)’,‘정직성(integrity)’, ‘자기 단련(self-discipline)’,‘타인 존중(respect for others)’, ‘개방성(openness)’,‘관대함(generosity)’, ‘진정성(authenticity)’등이 자질의 구체적인 예이다. 요컨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존재론적 성장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놓여진 이상 본인에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 그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러한 막연한 불안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 위한 성향과 자질을 키워주자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존재론적 성장을 방학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자. 사실상 학교교육의 존재론적 접근은 비단 방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학교 교육과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학기 중의 수업에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미 학기 중의 시 간은 과도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이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로 넘쳐 나고 있으므로, 그동안 거의 ‘공백’으로 내버려둔 방학이라는 시간부터 존재론적 성장의 기회로 가꾸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 본다.
방학의 실상을 들여다 보다
그렇다면, 현재의 방학은 어떤 시간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주위에서 방학을 보내는 학생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방학동안 많은 학생들은 학원에서 그 시간을 메운다. 학교에서 배웠던 혹은 앞으로 배울 지식을 단기간에 더 많이, 더 깊이, 더 빨리 배우기 위해 학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 경우 방학이 쉼의 시간이라 하지만 학교에서 학원으로 공간이 달라졌을 뿐, 그 시간은 어쩌면 더 약삭빠른 학습을 위한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방학동안 자신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학원을 찾는 학생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방학동안 빈 집에서 혼자 남겨지는 것을 피하고자 학원에 의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둔 나이가 어린 학생일수록 방학의 쉼이 달갑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안락한 ‘쉼’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여건 속에서 학부모도 학생도 차선책으로 맡겨질 곳을 찾아 학원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학원에라도 맡겨질 수 있는 학생은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아이들은 오롯이 방학의 쉼을 집에서 소외된 채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학생과 학부모의 어려움에 그치지 않는다. 방학이라는 빈 여백은 각 가정의 경제적 자본의 양과 문화적 질의 차이에 따라 향후 이어지는 학기 과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공백으로 비워둔 방학이라는 시간은 학생들이 제각각 어떻게 메우느냐에 따라 교육 질의 계층 격차를 벌어지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 학교에서 벌어지는 불행한 일들에 주목해 보자. 성숙을 지향하며 모인 학교이건만, 근래 학교에서 일어나는 관계 문제는 도를 지나친다. 경악할 정도로 잔인한 학교 폭력 사건, 왕따를 견디지 못한 자살 사건, 학생-학부모-교사 간의 깊어가는 불신 관계 등은 그단적인 예다. 이러한 사건들의 진행을 학교의 시간적 흐름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한데 뒤엉켜 생활하는 학기 중에 싹 트고 커지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다가, 어느 순간 방학이라는 공백 기간이 찾아오면, 모든 것은 그냥 그 상태로 덮어 진다. 학교는 문을 닫는다. 학기 중에 생긴 불온한 관계는 곪은 상태 그대로 당사자 각자의 상처와 몫으로 남겨진 채 휴지기에 들어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의 불확실성이 커짐으로써 지식의 위상이 떨어지는 가운데, 지식의 독점권을 가졌던 과거의 학교와 달리 근래의 학교는 지식의 가르침에서 그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학생 존재에 대한 보살핌, 사람과 사람 간의 바람직한 관계 형성이 더 중요한 학교의 역할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성의 문제는 방학이라는 단절된 시간 동안 자연 치유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증세를 악화시키는 방치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즉 관계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방학이라는 시간은 그저 놓아두는 단절의 시간이 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개선과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의 형성, 뒤틀림, 왜곡 과정 그 자체가 매우 연속적인 시간적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학기와 방학의 뚜렷한 단절적 시간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방학이라는 쉼의 시간은 이러한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는 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학기 중의 시간은 엄청난 지식의 양을 배우며 평가의 부담을 감당하느라 가까이 있는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부담에서 벗어난 방학의 기간에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나 자신의 존재됨을 성찰해 보고, 자신이 관계 맺고 있는 타자의 얼굴을 진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효과가 적지 않을 수 있다.
방학, 존재론적 성장, 그리고
학교의 역할을 새롭게 상상해 보다
방학의 존재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맞닥뜨린 이 시점에서 한번쯤 방학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흔히들 학교를 산업 시대에 고안된 제도라고 평가하듯이, 그 시간적 배치 또한 학기와 방학이라는 단절된 이분법적 구도로 짜여져 있는 것도 근대적 사유의 유물일 수 있다.

학교의 시간 배치를 조금 달리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어떨까? 학기 중은 공부 시간, 방학은 쉼의 시간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학기 중에도 놀이와 쉼의 시간을 늘리고, 방학 중에도 존재론적 성장을 향한 배움의 기회를 늘리는 방향으로 하이브리드형 시간 배치를 고안 해 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이때의 방학은 학생들이 교과서 중심의 지식을 배우는 대신, 다양한 활동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으로서 학생들이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강한 의지력과 ‘용기’, ‘진정성’, ‘정직성’, ‘회복탄력성’ 등의 인격적 자질을 기르며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내 주위에 있는 타인(친구, 선생님, 부모님, 그리고 이웃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통해 더 나은 관계를 맺어가는 성숙의 시간이 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초복 합성 시대에 교육의 존재론적 접근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방학이라는 시간은 이를 위한 절호의 시간일 수 있다.

물론, 존재론적 성장을 지향하는 방학을 위해 학교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과 방법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고, 앞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더군다나 학교라는 공간은 현실적으로 사회 제도의 일환으로서 여전히 관료적인 행정 규제로 인해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또한 학교의 상황도 제각각임을 감안할 때, 특정 프로그램이나 운영 방안을 강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한번쯤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그냥 ‘빈 여백’으로 두었던 방학의 역할에 대해 재조명해 볼 필요성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시작일 수 있다. 그리고 방학이라는 시간 동안 학생들의 존재론적 성장을 위해서 학교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은 연구와 실천들이 모이면 변화의 동력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학, ‘생기를 잃은 지식’의 배움을 내려놓는 시간이지만, 그것이 ‘존재적 성숙’에 한 발짝 더 다가감으로써 학생들이 불확실한 세계를 의연하게 살아나갈 힘을 얻는 시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Barnett, R.(2000). Supercomplexity and the curriculum. Studies in Higher Education, 25(3), 255-265.
Barnett, R.(2009). Knowing and becoming in the higher education curriculum. Studies in Higher Education, 34(4), 429-440.
Barnett, R.(2012). Learning for an unknown future. Higher Education Research & Development, 31(1), 6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