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기적을 이루다 - 강원 홍천여자고등학교
장은수 / 출판평론가·순천향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싸이월드 공감


기적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기적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업 중에, 갑자기,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묻는다. 학교 건물 모퉁이에 있는 구석진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은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창의 청춘을 제멋대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 제자들한테 반드시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났을 수도 있고, 답답한 현실을 시시하게 개탄하려고 운을 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우리가 한 말을 듣고 누군가의 생각이 바뀐다면 그것이 기적 아닐까요?”
생각의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번개이거나, 침묵의 황무지에서 불쑥 솟아난 한 송이 풀싹이었을 것이다. 의미의 깊이를 스스로 가늠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하여튼 멋진 소리, 즉 ‘헛소리’에 불과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선생님의 입을 막는다. 제자의 말에 담긴 심상치 않은 의미를 부지런히 새기느라 선생님의 머릿 속에 본래 있었던 말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음, 내 생각에도 네 말이 옳은 듯 싶구나.”
함께 나누는 대화가 인간을 바꾸고, 그를 통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 기적이라면, 그 순간 기적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본래 하려던 말을 목구멍 속으로 다시 밀어 넣음으로써, 선생님 자신의 인생이 영원히 바뀌었다. 듣기로 되어 있는 말을 듣지 못함으로써, 학생들의 인생도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을 타 버렸다. 그 말을 한 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기 목소리에 완전히 설득되어, 결국 진로를 바꾸고 ‘말의 힘’을 전달하는 소설가가 되어 버렸다. 일본의 소설가 이토 세이코의 에세이에 나오는 이야기다.

독서의 기적을 이룬 학교
홍천여고를 생각하자, 이 이야기가 자연스레 마음 속에 떠올랐다. 홍천여고는 강원도 시골 소읍에 위치한, 겉보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작고 아담한 학교다. 하지만 한 학년이 240명에 불과한 이 학교를 교육현장에서는 독서의 풍요를 이룩한 ‘기적의 학교’라고 부른다.
학교 도서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서가에 책들이 가지런하다. 군데군데 아이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탁자도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창가로 색색의 서류 파일이 나란히 꽂혀 있다.

‘말글터’ ‘시나브로’ ‘안다미로’ 등이 흰 라벨에 적혀 있다. 2015년 한 해 동안 홍천여고 1학년 학생들이 만든 독서 동아리 이름들이다. 파일 안에는 동아리 학생들이 손수 기록한 활동 기록이 차례로 정리되어 있다. 동아리 숫자가 무려 1학년에만 무려 마흔 한 곳에 이른다. 전체 학생의 4분의 3이 참여중이다. 교실붕괴를 일상적으로 염려하는 요즘 학교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입시에 지친 와중에도 학생들은 시간을 내서 함께 책을 읽고 같이 모여서 활동을 나눈다. 2016년에도 독서 동아리 열풍은 무사히 이어져 점심시간이면 도서실이 학생들로 북적댄다. 2학년 학생들이 1학년 학생들 한테 동아리 활동 경험을 나누어 주는 ‘언니들의 북토크’가 커다란 기여를 했다.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학교
홍천여고가 이룩한 ‘독서의 기적’은 이중적이다. 먼저, 보이는 기적은 학교 안에서 책을 읽는 학생이 일상에서 아주 쉽게 눈에 띄게 되었다는 점이다. 학생 독서 동아리 활동을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같이 읽기’를 활성화하는 데 헌신해 온 서현숙, 허보영 두 교사의 노력 덕분에 홍천여고는 독서 사막화 현상을 이겨 내고 책의 오아시스를 학교 안에 이룩할 수 있었다.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홍천여고’라는 표어가 단지 형식적 구호가 아니라 학교의 실질을 채우는 교육 목표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현숙 선생님이 말한다.

“지금까지 학생 독서 동아리는 많은 경우, 학생들 사이의 경쟁을 유발하는 독서 경연 중심으로 지도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 잘하고 말 잘하는 엘리트 학생들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죠. 나머지 학생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이러한 조건에서는 건강한 흥미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학생을 위한 모든 주제의 독서 동아리를 지향합니다. 학생들이 자율로 모임을 만들고 서로 읽을 책도 정합니다. 모임 크기도 두 명에서 대여섯 명까지 제각각입니다. 동아리 운영 경험을 서로 나누는 자리에서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형식을 정하지 않습니다.”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독서율은 갈수록 떨어지는 중이다. 한국의 고등학생 열 명 중 한 명(8.7%)은 한해 내내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 다섯 명(51.9%)은 스스로 독서량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세 명(31.8%)은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네 명 중 한 명(24.1%)은 책 읽기가 싫고 습관이 들지 않아서 책을 충분히 읽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열 명에 한 명쯤(7.2%)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독서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한다. 청소년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진 이래로 학교 일선 현장에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채, 메신저로 수다를 떨고 잡다한 연예소식에 흥분하고 어지러운 동영상을 즐기려 할 뿐이다.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 학생들은 점점 소수파로 몰려서 친구들 사이에서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숙제 등 의무로 책을 읽는 경우가 있을 뿐, 자발적인 독서는 갈수록 줄어드는 중이다.

홍천여고 학생들은 다르다. 교사가 모임을 주도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책을 스스로 골라 읽고 토론을 한다. 본래부터 친해서, 관심이 비슷해서, 우연히 마음이 맞아서,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모임을 함께하는 이유 조차도 다양하다. 온 학교에 독서의 열기가 뜨거울 뿐이다. 허보영 선생님이 말한다.

“책이 아니어도 학생들이 할 만한 자치활동은 많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보다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활동은 드물죠. 책을 읽으면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걸까, 하는 ‘불편한 의식’이 생기죠. 주어진 답을 외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세상에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성장입니다.”

두 사람은 이미 십여 년 전에도 홍천여고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 같이 독서교육을 고민했고, 그동안 각자 다른 학교에서 공부를 깊이 하고 경험의 두께를 늘렸다. 학교 현장은 독서를 일으키기에 척박했고, 혼자만으로는 항상 힘에 부쳤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독서교육을 제대로 해 보려고 근무지를 서로 맞추어 처음 만났던 홍천여고로 되돌아 왔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현장에서 절차탁마한 생각들을 꼼꼼하게 계획해, 학생들 스스로 모임을 이루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밑거름으로 부렸다. 그 결과가 학생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독서가 학교 내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학생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적이 더욱 중요하다. 지금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기적들이 이미 학교 전체에서 진행 중이다. 이토 세이코가 학창시절에 경험했던, 인생을 바꾸는 우연한 기적 말이다. 친구들과 약속 잡아 책을 읽고, 함께 만나 말을 통해 마음을 나누고, 힘차게 맞장구치면서 공명하고, 그 자리에서 느낀 바를 마음에 걸렀다 또다른 친구한테 전달하고, 이과정이 무한하게 되풀이되면서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는 작은 기적이 흘러 넘친다. 책이 사람을 사로잡아 대화를 만들고, 이야기가 사람을 붙잡아 미지의 인생길을 열어 젖히는 ‘촉발’의 거대한 집적이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책을 놓고 친구와 이야기 하다 보면, 자신도 몰랐던 말들이 마음에서 일어선다. 대화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생겨나는 자기 안의 거대한 창조성. 예측할 수도 없고 준비해 둘 수도 없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우발적으로 갑자기 피어나는 통찰의 꽃들.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경험하는 이러한 창발성이야말로, 어쩌면 미래를 통째로 변혁함으로써 그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는 법이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궁리한다. 인생이 자신에게 물어 오는 것에 진지하고 심각하게 답하려 한다. 이럴 때 아이들 한테 필요한 것은 경험을 갖춘 부모나 교사만은 아니다. 눈높이를 맞춘 우정의 연대가 더 필요하다. 친구들과 책을 같이 읽고 꿈을 나누는 것은 내면의 두께를 넉넉히 자라게 함으로써 평생 같이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 그러고 보면 홍천여고가 이룩한 독서 동아리는 학생들한테 인생 내내 동행할 우정의 동반자를 만들어 준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나날이 기적을 경험하는 학생들을 길러 내는 홍천여고의 미래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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